교동백(喬桐伯 휘 瑞)의 후예로서 내가 태어나게 된 옛 뿌리를 생각해 본다。조용한 곳에 앉아서 깊이 생각해 보고 세덕(世德)의 준렬(駿烈)함을 노래로 읊어 보노라 벼도 고개를 숙이게 되면 근본을 돌아본다했고 물이 여러 갈래가 되면 근원을 헤아려 본다 는 것이다。모든 사물울 보고 살펴보매 더구나 사람만이 몰라서야 되겠는가? 나의 뜻을 서문에 옮겨본다。 옛 일믈 생각하여 적어오고 옛 분들의 휼륭한 사적을 외워보매 연대가 틀려서 같지 않음이 슬픈 일이나 아득한 옛적부터 청백의 혈통(휘 瑞、휘 觀)을 타고 났도다。일찍이 진(晋)나라 때 우리나라로 나오셨고 드디어 신라왕에게 중히 오이셔서 석토 (錫土‥ 采地를 이름)로 교동백(喬桐伯)을 봉하셨네。그 후 여러대에 걸쳐 세계(世系)릍 잃어서 문헌에서 고증하기가 아득하고 어려워라、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창성하여 경반(卿班‥정승 반열)으로 임금을 보필하셨도다。시어사(侍御史‥휘 毅)ᅳ께서는 큰 절개가 있으사 왕에게 자주 간언(練言)하다가 초야로 물러나셨도다 문관들의 피화(被禍) 때에(鄭仲夫의亂) 즈음하여는 조정이 위란을 당하는 탄식이 있었다。(이때 우리 선조 어느분도 정주부에게 문관으로서의 핍박을 받았다 함) 오랑캐의 칼날을 당하여는 (몽고의 침략‥고려 고종때) 강화(講和)의 표문(表文)을 받들고 나가시매 그 땅이 위험한 곳임도 관계치 않으시고(휘 大紳공의 행적울 뜻함) 군중(軍中)의 장막읕 헤치고 나가셔서는 둔병(屯兵)의 폐지를 원(元)나라에 진정하셨도다。 (휘 公秀)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공이 많으사 一품 벼슬의 국록까지 누리셨고 원나라 조정의 조회에 가서 도끼까지 잡으셨고 원나라의 공주(公主)를 조석으로 만나 국가 이익을 도모하시었다。 (휘 候) 이렇게 한 집안에 정기(精氣)가 모여 우뚝함을 대대로 거듭하다가 한 때 모래 언덕에 미끄러지돗 하시었다。 고려중엽(中葉)에 이르러서는 초당공(草堂公‥휘 邠)께서 문장과 업적을 쌓으사 선비들의 으뜸이 되셨더니 불행히도 행주 남쪽 호수의 별장(別墅)을 떠나 동람(冬攬)의 옛 도읍지(함창읍)로 귀양오셨다가 인하여 돝아가셔서 영혼을 이 곳에 편안히 하시매 후손들이 옮겨 살게 되었도다。옛 연못에서 보모(風毛)릍 다시 볼 수 있듯이 석성부원 군(휘 璫)에 이르러 능히 계승하였구려、그 아드님이신 三형제가 모두 현달하셨으니 양전(兩銓‥즉 吏曹와 戶曹를 겸한 典理判書의 뜻으로 安이심)과 삼사좌윤(三司左尹)과 이부시랑(吏部侍郞‥휘 海이심)이셨도다。 나의 직조(直祖)는 삼사좌윤이시니 자손들의 벼슬이 잇고 이었었다。크게 병권(兵權)을 쥐었었고 이어서 전농사사(前農寺事‥휘 仁奇)요、주서(注書‥휘 廷瑞)에 이르러 나라가 이조로 바뀌었다。이태조(聖王)의 등극올 맞아서는 참찬(秦贊‥휘 士休)이셨고、이어서 춘추예문(春秋藝文‥휘 福庸)을 하셨도다。어린 선비들을 의흥(義興)에서 깉러내셨고 (휘 承孫‥咸昌派祖 이심) 정덕(正德‥중국 연호로 이조 중종초엽임)에 선균진사(휘 臣彦)가 되셨으되 큰 뜻을 펴시지 못하자 자연(林泉)의 그윽함을 즐기시고 풍월(風月)을 읊어서 시(詩)를 지으셨고 연못가에서 고기 노니는 것과 친하셨다。사마시 (司馬試 ‥진사 시험이니 진사 휘 臣彦공을 뜻함) 합격은 옛 집안에 또 경사가 들었네。(휘 紀께서 진사된 것을 말함) 맑은 조정에 이르러 음사(蔭仕)로 감역이 (휘 汝允)되셨고 아천(鶴川‥즉 영천 아천동) 옛 집에서 홀연히 상화(喪禍‥휘 원서께서 임진란에 순직)의 불행으로 선무(宣務‥휘 滌 병자호란 때 전투에서 부상당함)께서 옛 읍(咸昌邑)으로 되돌아 오셨다。마침내 순절(殉節ᅳ‥휘 元瑞로 임진왜란에 순직)하셔서 훌륭하신 사적을 남기셨으나 난리를 만나 실업(失業)하여서 장차 지붐이 낡고 섬돌과 층계가 없어지려 하네。서적의 유실됨이 슬프며 옛 집(堂構)의 무너짐이 섧도다。 상구(上九)에 석과(碩果)처럼 성하여 겨우 묵은 뿌리에서 새싹이 펴 나가게 되었니 어진 마을이 아니면 어찌 살았을까、고조 증조에서부터 여기에서 사셔서 이에 이르렀도다。구덕(舊德)의 이름(名氏)을 이어서 선조의 옛 땅에서 사노니 나의 몸에 이르기까지 四세(世)로서 아직은 선비의 기질이 떨어지지 않았도다。사재(思齋‥ 휘 臣彦)의 큰 행실을 추모하고 경암(敬菴‥ 휘 紀)의 효성을 추앙해 보도다。동쪽 산기슭에 집을 짓고 (芝東麓而有室) 특히 영모재(永募齋‥ 咸昌十六世 휘 龜文)에서 잘 이으셨었다。 온 마을을 두루 살피건대 모두 화수(花樹‥ 일가가 한집안 자손)일세 장공(張公)의 백인(百忍) 두 자를 버리지 않고 소씨(蘇氏)의 여섯가지 행함을 훈계 삼아 본분올 지켜서 마음 편하게 살으니 나를 알아 주는 이 없다하여 어찌 마음 상할소냐。조부님의 유훈을 받들어서 항상 일에 힘써 스스로 경계하노라。 一八二五년 光魯(함창) 삼가 지음 【註】 휘 光魯공은 지금부터 一백六十년전 분으로 二회보 즉 전에 남기신 글이므로 그대로 을 리는 바 世系가 現行七回世譜와는 조금 틀림。